씨애틀이 내 마음에 처음 다가온 것은 오래전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통해서였다. 그 도시의 지리나 역사를 알기 전에, 나는 그곳에서 들려오는 한 남자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를 듣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먼저 알았다. 씨애틀이라는 지명에는 그렇게 영화가 부여한 정서가 오래 붙어 있었다. 이번 시애틀 여행은 처음 방문하는 도시를 알아가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그보다 훨씬 먼저 내 안에 자리 잡은 도시의 이미지를 다시 읽는 시간이기도 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영화의 설정을 되짚어 보니, 애니 역시 비슷한 순서로 누군가에게 다가간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샘과 일상을 함께 보내거나 오랜 대화를 나눈 뒤 그에게 끌리지 않는다. 사별한 아내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를 라디오로 듣고, 자신이 이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샘에 관한 정보는 그 확신을 뒤따른다. 이미 약혼한 여성이 자신을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이 선택을 한국에서 익숙하게 접해 온 결혼의 셈법에 대입하면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결혼을 약속한 상대가 있고, 새롭게 마음이 향하는 남자에게는 사별의 경험과 어린아이를 돌보는 책임이 있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상당한 지리적 거리도 있다. 현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나는 아마 사랑의 강도보다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생활의 조건을 먼저 물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애니를 계산할 줄 모르는 인물로 보기도 어렵다. 그녀는 샘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조사하고, 직접 씨애틀까지 간다. 행동은 계획적이다. 다만 무엇을 위해 그 계획을 실행하는지에 관한 확신이, 그 확신을 뒷받침할 지식보다 앞서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성과 감정의 대립보다 판단 기준의 변화다. 어떤 사실은 한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지만, 다른 이야기 속에서는 그를 찾아가야 할 이유가 된다. 사별과 양육의 책임도 애니가 듣는 이야기 안에서는 한 남자의 헌신과 사랑의 능력을 보여 주는 표지가 될 수 있다. 그녀는 계산을 중단했다기보다, 무엇을 중요한 증거로 받아들일 것인지를 바꾸고 있는 듯하다.
라캉의 목소리 개념은 이 전환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의 정신분석에서 목소리는 의미를 운반하는 음성이나 아름다운 음색으로만 다루어지지 않는다. 목소리는 욕망의 원인인 ‘대상 a’의 한 형태로 논의된다. 라캉의 논의를 발전시킨 믈라덴 돌라르 역시 목소리가 전달하는 의미, 목소리를 감상하는 미적 즐거움, 그리고 그 두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목소리의 대상적 기능을 구별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목소리가 얼마나 매력적인가뿐 아니라, 그것이 듣는 사람을 어떤 위치에 놓는가이다.
이 관점에서 애니의 청취를 읽으면, 샘의 목소리는 상대를 알아보기 위한 자료 이상의 기능을 한다. 그는 애니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애니는 자신에게 보내지지 않은 말에서 자신의 미래와 관계될 가능성을 듣는다. 한 사람을 깊이 사랑했다고 말하는 남자의 이야기가, 자신도 그러한 사랑의 상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장면을 열어 주는 것이다. 내가 이 영화에서 주목하게 된 것은 목소리의 낭만성보다 이러한 청취의 구조다. 애니는 무엇을 들었기에, 아직 자신을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에 자기 삶을 걸기 시작하는가.
그 질문은 환상의 문제로 이어진다. 라캉의 환상은 현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생기는 일시적인 오해와 다르다. 그는 환상의 구조를 분열된 주체와 욕망의 원인인 대상 a의 관계로 정식화한다. 주체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완전히 알고 있는 존재가 아니며, 환상은 그 불확실한 욕망을 지탱하는 방식을 제공한다. 따라서 환상을 단순히 없애야 할 허구로 취급하면, 그것이 주체의 욕망을 구성하는 기능을 놓치게 된다.
애니가 원하는 샘에는 한 남자의 특성뿐 아니라 그와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차지하게 될 자리도 포함되어 있다고 읽을 수 있다. 아직 만나지 않았지만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 다른 이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신호를 알아듣는 사람, 이미 정해진 삶의 경로를 바꿀 만큼 중요한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 샘을 향한 그녀의 움직임에는 이러한 자기 위치의 문제가 함께 들어 있다. 환상은 상대의 얼굴에 덧씌운 아름다운 이미지에 그치지 않고, 그 상대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누구인가’를 조직한다.
영화는 이러한 사랑의 장면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드러낸다. 애니는 <An Affair to Remember>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해석하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의 만남이라는 구체적인 형식까지 빌려온다. 그녀의 가장 개인적인 확신에는 이미 다른 영화의 기억이 들어 있다.
이것을 단순한 모방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는 순간, 우리 자신의 사랑은 어떤 언어와 장면을 통해 이해되어 왔는지 묻지 않게 된다. 애니가 빌려온 이야기의 흔적이 유난히 선명할 뿐, 사랑을 알아보는 데 사용되는 표현과 기대가 모두 개인의 내부에서 처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문화적으로 배운 로맨스와 라캉의 근본적 환상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영화의 장면은 개인의 욕망이 자신을 표현할 재료가 된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모두가 애니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차이를 보여 준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이야기가 왜 이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특별한 권위를 얻게 되는가이다. 이 영화에 대한 나의 독해에서 환상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가 한 사람에게는 아직 살아 보지 않은 삶의 가능성으로 작동한다.
이번 딥 리스닝 재즈에서는 그 문제를 영화의 수록곡 바깥으로 옮겨 보고 싶었다. 익숙한 러브송이 불러오는 기억을 잠시 유보하고, 끌림과 기대, 준비된 형식과 예측할 수 없는 응답이 음악 안에서 어떻게 공존하는지 들어보려는 것이다. 영화와 음악을 나란히 놓는 이유는 각 곡에 등장인물의 심리를 배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의 작품에서 생긴 질문이 다른 작품을 듣는 방식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에런 파크스의 “Delusions”는 그 출발점이 된다. Little Big III(2024)에 수록된 이 곡은 귀에 남는 선율과 어둡고 불안한 색조를 함께 지니며, 그레그 투히의 거친 기타 솔로로 긴장을 밀어 올린다. 파크스는 이 앨범을 만들면서 완벽한 테이크를 통제하려는 태도보다 밴드가 드러내는 소리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이동했다고 설명한다. 내가 이 곡에서 영화와 함께 생각하고 싶은 것은 매혹과 불확실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소리는 먼저 주의를 붙들지만, 그 주의가 붙잡힌 이유는 듣는 과정에서 계속 달라질 수 있다. 처음 귀에 들어온 선율이 곡 전체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세실 맥로린 살반트의 “Obligation”은 이 청취에 다른 긴장을 더한다. Ghost Song(2022)의 짧은 곡인 “Obligation”에서 친밀성은 의무와 기대, 압박의 문제와 마주한다. 살반트는 기대가 미리 준비된 원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곡이 출발했다고 말한다. 이 곡의 관계를 애니와 월터의 관계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다. 다만 함께 듣고 나면 ‘관계를 유지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판단과 ‘그 관계를 원한다’는 감각 사이의 간격이 더 분명해진다.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약속을 했다는 사실,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는 판단이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로 바뀌는 순간을 생각하게 한다.
이때 샘을 향한 애니의 끌림을 모든 의무에서 해방된 순수한 감정으로 치켜세우는 것 역시 충분하지 않다. 조건이 잘 맞는다는 사실이 사랑을 보증하지 못하듯, 강렬하게 끌린다는 사실도 두 사람의 미래를 보증하지 못한다. 라캉이 <세미나 20: 앙코르>에서 말하는 ‘성적 관계는 없다’는 명제는 실제 연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말하는 존재들의 관계를 완전한 상보성으로 보장하는 관계식을 쓸 수 없다는 문제다. 사랑은 그 불가능성이 사라진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논의된다.
메리 핼버슨의 “Night Shift”는 이런 보증의 문제를 음악적으로 생각할 자리를 마련한다. Amaryllis(2022)의 음악은 기타, 비브라폰, 금관, 베이스와 드럼을 위한 작곡과 즉흥연주자들의 역량을 함께 조직한다. 핼버슨이 이 프로젝트에서 구상한 것은 분리되어 존재하면서도 서로 결합할 수 있는 구조였다. 여기에서 자유는 준비된 것을 모두 버리는 일과 거리가 있다. 연주자들이 공유하는 음악적 조건이 있어야 서로의 움직임에 응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조건이 매 순간의 응답을 하나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듣는 관심도 누가 얼마나 독창적인 소리를 내는가에서, 한 사람의 제안이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며 어떻게 달라지는가로 이동한다.
영화로 돌아오면 애니에게도 이미 삶의 질서가 있었다. 직업과 약혼, 결혼으로 이어질 일정이 있었고, 그 질서 안으로 방송을 듣는 일이 들어왔다. 그 방송은 듣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듣고도 지나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애니가 거기에 붙잡힌 뒤에는 이전의 관계와 앞으로의 선택까지 다른 의미를 얻는다.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자신이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의 이야기로 바뀐다.
라캉은 <앙코르>에서 사랑을 우연성에서 필연성으로 향하는 움직임과 연결한다. 우연히 성립한 만남이 멈추지 않고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 한 번 일어난 일이 자신의 운명에 새겨진 것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요구에 매혹적인 형태를 부여한다. 관객은 두 사람이 만나야 한다고 바라게 되고, 그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 앞서 있었던 우회와 지연도 하나의 경로로 읽힌다. 하지만 만남의 성취가 함께 살아갈 시간까지 보여 주지는 않는다. 영화가 완성하는 것은 만남의 이야기이며, 관계의 지속은 그 이후에 남는다.
비제이 아이어 트리오의 “Historicity”를 이 흐름의 마지막 현대 재즈 곡으로 놓은 이유는, 여기까지의 질문을 과거와 현재의 관계 속에서 다시 듣기 위해서다. 아이어는 동명 앨범에서 역사 속에 놓인다는 것, 과거가 현재의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중심 문제로 삼았다. 이 관점에서 음악의 새로움은 과거로부터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지만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물려받은 리듬과 형식, 이미 듣고 익힌 음악이 지금의 연주에서 어떤 관계로 다시 조직되는지가 중요해진다. 애니가 오래된 영화의 장면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듯, 연주자는 이미 존재하는 음악적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언어만으로 미리 결정할 수 없는 시간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익숙함과 새로움은 반드시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익숙한 형식은 때로 새로운 경험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씨애틀을 떠올린다. 오래전 영화가 부여한 이미지가 없었다면, 이번 여행에서 내가 주의를 기울인 것과 기억에 남긴 것도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고 실제 도시가 영화의 이미지를 확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여행의 경험은 그 이미지를 수정하고, 이미지는 다시 경험을 해석하는 데 관여한다. 처음 가본 도시가 낯설면서도 오래 알고 있던 곳처럼 느껴지는 데에는 그 두 시간이 함께 작용한다.
감상의 마지막에는 셀린 디옹과 클라이브 그리핀이 부른 “When I Fall in Love”를 놓고 싶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주제가로 녹음된 이 노래는 사랑을 영원이라는 조건 아래 상상한다.
앞선 음악들이 관계의 불확실성과 형식의 작용을 생각하게 했다면, 이 노래는 다시 확신을 말한다. 그 확신을 순진함으로 처리하는 대신, 우리는 왜 불확실한 경험에 이토록 단호한 언어를 부여하는지 들어볼 수 있다. 노래가 표현하는 것은 미래에 관해 확보한 지식이라기보다, 그 미래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형식일 것이다.
씨애틀은 내게 처음부터 그런 형식 속에서 다가온 도시였다. 내가 그곳을 방문하기 오래전, 영화와 음악이 먼저 그 이름에 의미를 부여했다. 여행을 다녀온 지금도 그 의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이름 안에 들어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오래전 영화를 보던 나와 이번에 도시를 지나온 나,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경험이 함께 남아 있다.
환상의 역설이라는 말을 쓴다면, 나는 이 겹침을 가리키고 싶다. 경험에 앞서 있던 언어와 이미지가 경험의 고유함을 모두 빼앗지는 않는다. 오래된 곡도 그것을 연주하는 지금의 시간까지 미리 담아 두지는 못한다. 사랑 역시 이미 배운 말과 장면을 통해 자신을 알아보면서, 그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일이 된다. 우리는 이미 수없이 들어 온 사랑의 언어로, 매번 처음인 것처럼 사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