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네트 콜맨을 둘러싼 가장 오래된 오해는, 그의 음악을 두 가지 중 하나로만 분류하려는 습관에서 시작된다. 하나는 전기적(傳記的) 서사다. “자기만의 길을 간 천재”, “비난을 뚫고 새로운 재즈를 연 혁명가” 같은 이야기들이다. 다른 하나는 이론적 체계화다. 오네트 콜맨이 제창한 ‘하모로딕스(Harmolodics)’라는 개념을 일종의 통일된 시스템의 이름처럼 간주하고, 그 시스템의 규칙을 추출해 설명하려는 시도다. 전자는 감동을 주지만 음악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붙잡기 어렵고, 후자는 구조를 제시하지만 음악이 작동하는 ‘살아 있는 순간’을 빠르게 굳혀버린다.
하모로딕스란, 오네트 콜맨이 자신의 음악 실천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로, 화성·멜로디·리듬 중 어느 하나도 기준(중심, 토대, 좌표)으로 전제하지 않은 채, 각 음성과 움직임이 동등한 위치에서 동시에 작동하도록 배치하는 음악적 사고 방식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이론 체계라기보다, 정렬(alignment)을 요구하는 기존 음악 문법을 유예시키는 조건에 가깝다.
즉, 하모로딕스는 다음을 전제로 한다.
기준의 철회: 화성은 토대가 아니다. 리듬은 지휘자가 아니다. 멜로디는 설명되지 않는다
동등한 위치의 공존: 각 파트는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인다. 동시에,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정렬 대신 관계: 맞는다 / 틀린다가 아니라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가 문제다
결과가 아니라 이동의 지속: 목적지나 해결을 전제하지 않는다. 이동이 멈추지 않는 상태를 유지한다.
다시 말해 하모로딕스는 추가된 규칙이 아니라, 규칙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사고이다.
하모로딕스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생각은, 음악에는 언제나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전통적인 재즈에서 이 중심은 비교적 명확했다. 화성은 이동의 좌표였고, 리듬은 시간을 조직했으며, 멜로디는 그 위에서 의미를 만들었다. 즉흥이란 이 좌표와 시간에 얼마나 정밀하게 정렬되는가의 문제였다. 체인지(changes)를 안다, 타임이 좋다, 튜닝이 맞다 등의 말들은 모두 이 정렬의 질을 평가하는 언어였다.
이 정의에서 중요한 것은 ‘동등함’이 민주적 이상이나 역할 분담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모로딕스에서 동등하다는 것은, 누구도 기준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다. 화성은 더 이상 토대가 아니고, 리듬은 지휘자가 아니며, 멜로디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화성이 사라지거나 리듬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핵심은 제거가 아니라 전제의 철회다. 무엇이 기준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음악 안에서 더 이상 자동으로 처리하지 않겠다는 선택.
이 선택은 곧바로 음악의 배치를 바꾼다. 하모로딕스에서는 각 소리가 독립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독립은 고립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소리는 다른 소리들과 정렬되지 않은 채로 관계를 유지한다. 누군가를 따라가야 할 중심이 없기 때문에, 각 소리는 자기 위치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진다. 이때 음악은 느슨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긴장이 유지된다. 기준이 없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뜻이 아니라, 도망칠 곳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모로딕스는 종종 ‘out of tune’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 어긋남은 음정의 문제라기보다 청취의 문제다. 우리는 오랫동안 어떤 소리에 권위를 전이시켜 왔다. 리듬에 기대고, 화성에 기대고, 그 위에서 다른 소리들을 판단해왔다. 하모로딕스는 이 전이를 작동하지 않게 만든다. 그 결과 청취자는 계속해서 미끄러진다. 어디에 귀를 두어야 할지, 무엇을 따라야 할지 확정할 수 없게 된다. 이 불확정성이 불편함으로 들릴 때, 우리는 그것을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하모로딕스는 가장 정확하게 작동한다. 하모로딕스는 음악을 자유롭게 만드는 개념이 아니라, 청취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개념이다. 기준을 찾으려는 귀를 멈추게 하고, 정렬되지 않은 관계가 유지되는 상태를 끝까지 견디게 만든다. 이 상태에서 음악은 더 이상 결과나 구조로 들리지 않는다. 대신 이동과 관계의 지속으로 경험된다.
어느 것도 기준이 되지 않으며, 이동은 목적지나 해결을 전제하지 않는다.
하모로딕스는 규칙이 아니라, 기준이 비워진 상태를 유지하는 조건임을 이 이미지는 암시한다.
Ornette Coleman, 말하기, 그리고 기준이 비워진 음악
오네트 콜맨의 하모로딕스를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오네트의 말(말하기, 말의 궤적, 말의 미끄러짐)을 출발점으로 삼아볼 것을 제시한다. 왜 갑자기 말인가. 재즈는 연주가 핵심이고, 오네트는 특히 ‘연주로 말하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왜 굳이 말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오네트의 발화에는 유난히 자주 “관계”, “따라감”, “어디로 감”, “공간”, “장(field)” 같은 어휘가 등장하고, 그 말들은 음악에 대한 해설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회적 관계, 인정과 배제, 실패와 폭력, 기회와 교육, 공동체의 문제까지 자연스럽게 건너다닌다. 다시 말해 오네트의 말은 부연 설명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음악을 어떤 종류의 문제로 사유하는지를 보여주는 지도에 가깝다. 다만 그 지도는 평평하지 않다. 말은 종종 스스로와 어긋나고, 하나를 말하다 다른 것을 암시하며, 설명을 시도하는 순간 미끄러진다. 중요한 것은, 이 틈이 결함이 아니라 작동하는 구조라는 점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발화가 있다. 하모로딕스가 실제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젊은 연주자 찰리 헤이든(Charlie Haden)이 오네트 콜맨과 처음 함께 연주하던 무렵의 일화다. 당시 찰리 헤이든은 전통적인 재즈 교육을 받은 베이시스트였고, 악보와 화성 진행, 타임에 대한 감각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러나 오네트와 연주를 시작하자, 그 기준들은 거의 즉시 무력화되었다. 무엇을 기준으로 연주해야 하는지, 어디에 맞춰야 하는지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찰리 헤이든의 회고록을 보면 그때 오네트가 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있다.
“You follow me, and you go where I go.”
“넌 나를 따라와, 내가 가는 곳으로 가.”
이 말은 명령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목적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어디로 가는지는 말해지지 않고, 오직 가고 있음만이 강조된다. 여기서 ‘따름 (follow)’는 모방이나 복종이 아니라, 같은 좌표 없이 이동을 공유하는 상태를 뜻한다. 하모로딕스는 이미 이 한 문장 안에서, 규칙이 아니라 관계의 조건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하모로딕스를 흔히 “화성·멜로디·리듬의 위계를 제거한 개념”이라고 설명하지만, 이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모로딕스는 무엇을 새로 추가하는 개념이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삼지 않을 것인가를 다루는 개념이다. 전통적인 재즈에서 우리는 늘 기준을 찾는다. 박이 기준이 되거나, 화성이 기준이 되거나, 솔로가 중심이 된다. 즉흥은 그 기준에 얼마나 잘 정렬되어 있는지로 평가된다. “체인지(코드 체인지)를 안다”, “튜닝이 맞다”는 말은 모두 이 정렬의 언어다. 하모로딕스는 이 언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언어가 유일한 판단 기준이 되는 상황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점은 오네트 콜맨의 대표곡인 Lonely Woman을 들으면 분명해진다. 이 곡에서 드럼(과 베이스는 분명한 추진력을 만들어낸다. 시간은 앞으로 간다. 그러나 이 시간은 다른 파트를 조직하지 않는다. 멜로디를 끌고 가지도, 그 위에 얹히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동시에 색소폰과 트럼펫의 멜로디는 그 시간에 맞추려 하지 않는다. 늦거나 빠르기보다는, 다른 지속 속에 머문다. 여기에는 충돌이 있지만 위계는 없다. 어느 쪽도 기준이 되지 않고, 어느 쪽도 교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튜닝에 대한 발화, 오류가 아니라 분열을 듣는 귀
또다른 오네트의 발화를 보자.
“I realized that you could play sharp or flat and still be in tune.”
“나는 음을 높게 또는 낮게 연주해도 여전히 음정이 맞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문장은 기술적 발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체성에 관한 말에 가깝다.
‘in tune’이 하나의 고정점이 아니라는 선언이며, 음정이 아니라 관계 속 위치가 중요하다는 암시다. 하모로딕스는 맞고 틀리다의 논리를 제거하지 않는다. 대신 그 논리를 관계적 감각으로 이동시킨다.
그래서 하모로딕스는 종종 ‘out of tune’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는 음정의 문제라기보다 청취의 문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소리에 기준을 전이시키고, 나머지를 그 기준에 맞춰 판단해왔다. 하모로딕스는 이 전이를 작동하지 않게 만든다. 그 결과 청취자는 계속해서 미끄러진다. 어디에 귀를 두어야 할지, 무엇을 따라야 할지 확정할 수 없게 된다. 이 불확정성이 불편함으로 들릴 때, 우리는 그것을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네트는 이 불편함을 오류로 보지 않는다.
“Harmolodics is a way of playing where everybody is equal.”
하모로디크스는 모두가 동등한 방식으로 연주하는 기법이다.
오네트 콜맨이 하모로닉스를 이렇게 말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즉시 이 문장을 정치적 은유나 윤리적 선언처럼 받아들인다. “모두가 평등하다”, “민주적인 음악이다”, “리더가 없는 음악이다” 같은 해석들이다. 그러나 이 해석들은 대부분, 오네트의 말이 어디에서 멈추는지를 보지 못한 데서 나온다.
이 문장은 놀라울 정도로 불친절하다. ‘equal’이 무엇에 대해 동등한지 말하지 않고, 어떤 요소들이 동등한지도 명시하지 않으며, 동등함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 결핍은 우연이 아니다. 이 문장은 의도적으로 규칙을 제시하지 않는다.
보통 음악 이론에서 “동등하다”는 말은 명확한 전제를 필요로 한다. 무엇과 무엇이 동등한가? 화성과 멜로디인가, 연주자들인가, 역할인가, 발언권인가? 그러나 오네트는 그 질문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동등함을 비교의 결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비교가 성립하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everybody is equal”이라는 말은 “모두가 같은 역할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오히려 그것은 누구도 기준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뜻에 가깝다.
보통 음악 이론에서 “동등하다”는 말은 명확한 전제를 필요로 한다. 무엇과 무엇이 동등한가? 화성과 멜로디인가, 연주자들인가, 역할인가, 발언권인가? 그러나 오네트는 그 질문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동등함을 비교의 결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비교가 성립하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everybody is equal”이라는 말은 “모두가 같은 역할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누구도 기준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뜻에 가깝다.
전통적인 재즈 연주 상황을 떠올려보자. 리듬 섹션은 시간을 고정하고, 화성 악기는 좌표를 제시하며, 솔로 악기는 그 위에서 움직인다. 이 구조에서는 이미 불평등이 아니라 위계가 작동한다. 어떤 소리는 토대가 되고, 어떤 소리는 그 위에 얹힌다. 이 위계는 억압이 아니라 기능이며, 대부분의 경우 잘 작동한다. 문제는, 이 위계가 자연법처럼 전제될 때다.
오네트의 발화는 바로 이 전제를 거둬들인다. 그는 “리듬이 기준이다”도, “멜로디가 중심이다”도, “화성이 질서를 만든다”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아무도 그 자리에 앉지 않는 상태를 상정한다.
이때 “equal”은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위치에 관한 말이 된다. 모든 음과 모든 연주자는 동등하게 중요해서가 아니라,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정렬시킬 권한을 갖지 않기 때문에 동등하다.
이것이 하모로딕스가 “설명되지 않는 설명”으로 남는 이유다. 만약 오네트가 “리듬과 멜로디는 이렇게 관계 맺는다”거나 “화성은 이런 방식으로 해체된다”고 말했다면, 그 순간 하모로딕스는 다시 하나의 시스템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시스템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 대신, 연주자와 청취자 모두에게 하나의 불안정한 상황을 요구한다.
기준이 없다면, 각 소리는 스스로의 위치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누군가의 기준에 기대어 “맞았다”고 말할 수 없고, 어디에 속해 있는지도 자동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문장은 듣는 사람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것처럼 작동한다.
지금 이 음악에서
당신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기준은 정말 필요했는가?
이 질문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 불편함 자체가 이미 하모로딕스의 작동이다.
요약하면, “everybody is equal”은 평등의 선언이 아니라, 기준의 철회다.
하모로딕스는 이 철회가 음악 안에서 실제로 유지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 상태를 끝까지 견딜 수 있는지를 시험한다. 그래서 이 문장은 설명이 아니라, 상태를 여는 발화로 남는다.
좋아요. 전체 제목 + 소제목을 먼저 제시하고,
마지막에 짧고 단단한 결론만 붙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지를 반복하지 않고, 닫되 굳히지 않는 방식으로 마무리합니다.
이해가 아니라 위치의 문제
하모로딕스는 새로운 규칙을 제안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기준을 잠시 비워두자는 요청에 가깝다. 무엇이 중심인가, 무엇에 맞춰야 하는가, 무엇이 옳은가라는 질문을 음악 안에서 자동으로 처리하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그래서 하모로딕스는 음악을 더 쉽게 이해하게 만들지 않는다. 반대로, 듣는 사람을 불안정한 위치에 놓는다. 어디에 귀를 두어야 할지, 무엇을 따라야 할지 확정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음악은 구조나 결과가 아니라 이동과 관계가 지속되는 상태로 경험된다.
오네트 콜맨의 음악이 여전히 낯설게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어떤 기준을 붙잡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모로딕스는 그 기준을 부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지금 이 음악에서 당신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기준은, 정말 필요한가.
그 질문이 끝까지 남아 있는 한, 하모로딕스는 설명된 개념이 아니라 여전히 작동 중인 사고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