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핵심 인물인 쳇 베이커를 소개하며, 흔히 혼동되는 스무스 재즈(Smooth Jazz)와 쿨 재즈(Cool Jazz)의 차이를 짚어보는 데서 출발한다. 쳇 베이커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연주자다. 그의 음악, 삶, 그리고 파란만장한 사생활은 전기와 다큐멘터리, 영화로까지 반복 재현되어 왔다. 그러나 재즈를 진지하게 듣고 연주 언어로 접근하려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익숙한 이미지’ 너머의 쳇 베이커다.
대중이 떠올리는 쳇 베이커의 이미지는 비교적 명확하다. ‘재즈의 제임스 딘’이라는 별명처럼 수려한 외모, 부드럽고 듣기 편한 사운드, 우울한 정조, 그리고 자기파괴적인 삶. 특히 마약 중독으로 인한 말년의 초췌한 모습은 그의 음악을 감상적 비극 서사로 환원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가 쳇 베이커의 음악적 본질을 설명해 주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의 음악이 “듣기 편하다”는 평가는 상당 부분 사실이다. 트럼펫 톤은 얇고 섬세하며, 보컬은 마치 상처받기 쉬운 감수성을 노출하듯 연약하다. 그의 자서전이자 영화 제목이기도 한 Born to Be Blue는 이러한 인상을 상징적으로 요약한다. 그렇다면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이 ‘편안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스무스 재즈의 편안함과 같은 것일까?
스무스 재즈와 쿨 재즈는 무엇이 다른가
스무스 재즈는 1980년대 미국의 라디오 방송국들이 만들어낸 용어다. 말 그대로 부드럽고 듣기 쉬운 재즈, 혹은 재즈의 외피를 두른 대중음악을 지칭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 흐름의 대표 주자는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자 케니 G다. 스무스 재즈는 기본적으로 팝 음악의 문법 위에 놓여 있으며, 다이아토닉(온음계) 중심의 예측 가능한 구조를 갖는다. 음향은 매끈하고 자극은 최소화되며, 청취 경험은 편안하지만 음악적 언어는 제한적이다.
이러한 제한성 때문에 스무스 재즈는 미학적으로 빠르게 소진된다. 반복 가능한 패턴과 안전한 화성 진행은 듣는 이를 긴장시키지 않지만, 동시에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지도 않는다. 이 점에서 스무스 재즈는 재즈의 역사 안에서 중요한 미학적 진보로 기록되지 않는다. 재즈가 지닌 즉흥성, 위험 감수, 순간적 선택의 밀도는 이 장르에서 거의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케니 G는 재즈 뮤지션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문제는 그가 대중에게 ‘재즈 연주자’로 인식되고, 스스로도 그러한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어필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재즈라는 음악 언어에 대한 오해를 확산시킨다는 비판으로 이어져 왔다.
1999년, 케니 G가 루이 암스트롱의 명곡 〈What a Wonderful World〉를 기존 녹음 위에 덧입히는 방식으로 발표했을 때, 기타리스트 팻 매써니는 공개적으로 격렬한 비난을 쏟아냈다. 그는 이 연주를 두고 재즈의 정신을 훼손한 행위라고까지 표현했다. 재즈가 오랜 훈련과 긴장 속에서 획득되는 고밀도의 즉흥 음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분노는 단순한 취향 차이를 넘어선 것이었다.
‘공존의 영역’에 선 연주자들
스무스 재즈 계열의 연주자들 가운데에는 재즈와 일정한 ‘공존의 영역’을 유지하는 인물들도 있다.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 마이클 부블레, 크리스 보티, 그리고 다이아나 크롤 등이 그 예다. 특히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와 다이아나 크롤은 정통 재즈 훈련을 받은 연주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커리어는 재즈의 미학적 진화보다는 팝 차트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전설적인 재즈 비평가 냇 헨토프는 다이아나 크롤을 재즈 연주자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재즈의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겠지만, 재즈사는 실제로 그러한 냉정한 판단의 축적으로 형성되어 왔다. 크롤의 최근 작업들이 반복적이고 상투적이라는 비판 또한 이 맥락에서 나온다.
다만 필자는 이 지점에서 헨토프와 의견을 달리한다. 다이아나 크롤은 재즈를 잘 모르는 대중에게 ‘재즈 클럽에 가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연주자다. 이는 결코 사소한 기여가 아니다. 재즈는 언제나 소수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청자를 필요로 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크리스 보티 역시 복합적인 평가의 대상이다. 그의 Chris Botti in Boston(2009) 같은 앨범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이후 작업들은 일정한 이미지와 사운드를 반복해 왔다. 블루노트 재즈 클럽에서의 〈What a Wonderful World〉 연주는, ‘뮤지컬 조크’의 선을 넘은 빈약한 재현으로 느껴질 만큼 실망스러웠다.
쿨 재즈, 그리고 쳇 베이커의 언어
그렇다면 쿨 재즈는 무엇인가. 쿨 재즈 역시 부드럽고 절제된 표면을 가진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은 단순한 ‘청취의 편안함’이 아니라, 고도로 정제된 언어의 결과다. 쿨 재즈는 미학적으로, 문화적으로, 철학적으로 스무스 재즈와 전혀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재즈를 하나의 언어로 본다면, 쳇 베이커는 이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자기만의 문장으로 말할 줄 알았던 연주자다. 그의 즉흥은 과시적이지 않고, 화려한 테크닉을 앞세우지도 않는다. 대신 최소한의 음으로 최대한의 정서를 전달한다. 이는 단순함이 아니라, 세공된 단순함이다.
쳇 베이커의 연주는 ‘연약함’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능력의 결핍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다. 그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재즈 언어를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중 가장 정직한 어조를 선택했다. 이 점에서 쳇 베이커는 쿨 재즈의 미학을 체현한 연주자이며, 결코 스무스 재즈의 범주로 환원될 수 없다.
다음 글에서는 쳇 베이커의 음악적 생애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그의 연주가 어떻게 하나의 일관된 언어로 형성되었는지를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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