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는 기독교의 절기 중 가장 쉽게 소비되는 시간이다. 거리에는 음악이 넘치고, 교회는 따뜻한 언어로 가득 차며, 탄생의 이야기는 익숙한 감동으로 반복된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보면 성탄은 안온한 결말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아직 불확실한 상태로 시작된 사건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고백은 설명이 아니라 부담을 남긴다. 그 이후의 시간,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즉시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재즈는 크리스마스를 장식하는 음악이 아니라, 크리스마스 이후의 시간을 사유하게 만드는 음악으로 등장한다.
탄생은 언제나 준비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다
복음서의 성탄 이야기는 낭만과 거리가 멀다. 정치적 통제 속에서의 이동, 거부된 숙소, 임시적인 장소, 그리고 곧이어 등장하는 폭력과 도피. 이 서사는 질서 속에 부드럽게 들어온 구원이 아니라, 질서가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 속으로 침투한 사건에 가깝다. 성탄은 세계가 안정되었음을 알리는 표지가 아니라, 세계가 더 이상 이전 방식으로 유지될 수 없음을 드러내는 균열이다.
재즈 역시 안정된 제도나 중심부의 미학에서 태어난 음악이 아니다. 그것은 완성된 계획의 결과물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조건 속에서 시간을 견디고 조정하기 위해 형성된 실천이다. 재즈의 탄생은 선언이 아니라 응답이었다. 이 점에서 재즈는 성탄을 설명하지 않지만, 성탄이 실제로 발생했던 방식(예상되지 않았고, 준비되지 않았으며, 이후의 삶을 바꿔놓은 방식)과 유사한 시간 구조를 갖고 있다.
즉흥은 자유가 아니라 책임이다
재즈를 “자유로운 음악”으로 설명하는 것은 절반만 맞다. 즉흥 연주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선언이 아니라, 이미 울리고 있는 소리에 대해 책임 있게 반응해야 하는 상황이다. 코드 진행, 리듬, 앞선 연주자의 선택은 연주자에게 분명한 요구를 던진다. 즉흥은 그 요구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 기술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소명(vocation)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소명은 자아실현의 언어가 아니라, 이미 도달한 부름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의 현실을 호출한 사건이며, 그 호출 이후의 시간은 자동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재즈의 즉흥은 그 이후의 시간을 살아내는 방식(결정하고, 조정하고, 책임지는 방식)을 음악적으로 훈련시킨다. 즉흥은 신앙의 비유가 아니라, 신앙 이후의 윤리를 연습하는 기술이다.
믿음은 완성된 체계가 아니라, 계속 조정되는 응답이다
기독교 신앙은 종종 확고한 교리 체계로 이해되지만, 성서의 내적 구조를 보면 오히려 반복되는 것은 확신보다 응답이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명령하지 않고 부르며, 인간은 그 부름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그 반응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종종 수정되며, 때로는 침묵과 지연을 포함한다.
재즈의 즉흥은 이 구조를 음악적으로 구현한다. 즉흥은 무에서 창조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조건(리듬, 화성, 다른 연주자의 선택)에 대한 지속적인 조정이다. 연주자는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 점에서 재즈의 즉흥은 신앙의 은유가 아니라, 신앙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과 동형적이다.
블루 노트: 죄나 갈등이 아니라, 닫히지 않은 인간성
블루 노트는 흔히 고통이나 갈등의 상징으로 해석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도덕적 해석이다. 블루 노트의 본질은 슬픔이 아니라 결정되지 않음이다. 메이저와 마이너 사이에 위치한 이 음은 감정을 어느 한쪽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이 명확한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리로 유지한다.
기독교의 인간 이해 역시 그렇다. 인간은 의인도, 완전히 타락한 존재도 아니다. 신앙은 인간을 분류하기보다, 모순을 품은 채 관계 안에 머물게 한다. 블루 노트는 이 인간 이해를 감상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음정이라는 물리적 현실 속에 그대로 남겨둔다.
교회 안으로 들어온 재즈, 그러나 장식이 아닌 질문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일부 재즈 음악가들은 재즈를 다시 교회 공간으로 가져왔다. 이는 세속 음악을 성화하려는 시도라기보다, 예배의 언어가 현실과 다시 접속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의 Sacred Concerts는 크리스마스를 장엄하게 만들기보다, 인간의 불완전함과 공동체의 긴장을 음악 안에 그대로 남긴다.
메리 루 윌리엄스(Mary Lou Williams)의 전례 음악 역시 성스러움을 정제하기보다, 성스러움이 현실의 리듬과 충돌하는 순간을 숨기지 않는다.
이들의 작업에서 재즈는 배경음이 아니라, 예배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의 형식이 된다.
크리스마스에 재즈를 듣는다는 것
크리스마스에 재즈를 듣는다는 것은 분위기를 바꾸는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성탄을 “이미 끝난 이야기”로 소비하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재즈는 탄생의 기쁨을 반복하지 않는다. 대신 탄생 이후에 요구되는 삶의 리듬을 들려준다.
재즈는 신앙을 설명하지 않는다. 설교도, 고백도 아니다. 그러나 말씀이 현실에 들어온 이후 인간이 감당해야 할 시간(불확실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시간)을 가장 정확하게 소리로 구현한다. 크리스마스 이후의 삶이란, 아마도 그런 시간일 것이다.
기독교적 삶의 시간 감각을 소리로 경험하는 음악 — (1)
(“크리스마스 음악”이 아님)
Bill Evans, Peace Piece, Everybody Digs Bill Evans, Riverside [Recorded: December 15, 1958]
반복되는 화성 위에서 즉흥은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시간 관리의 문제로 드러난다. 자유는 넓지만, 선택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반복되는 화성은 배경이 아니라 조건이다. 왼손이 유지하는 단순한 오스티나토는 진행을 만들지 않고, 방향을 예고하지도 않는다. 음악은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같은 자리에 머문다. 이 고정된 조건 위에서 Evans의 즉흥은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다,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드러난다.즉흥은 여기서 무엇을 더 말할지의 문제가 아니다. 언제 멈출지, 얼마나 기다릴지, 같은 생각을 조금 더 붙잡을지에 대한 선택의 연속이다. 화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는 오직 연주자의 판단에서만 발생한다. 그래서 자유는 넓다. 거의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선택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한 음은 쉽게 지나갈 수 있지만, 한 침묵은 음악 전체의 밀도를 바꾼다.
Peace Piece에서 즉흥은 해소를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긴장은 쌓이기보다 유지되고, 감정은 정리되기보다 머문다. 음악은 위안을 약속하지 않지만, 시간을 함부로 소비하지도 않는다. Evans는 이 곡에서 즉흥을 표현의 자유로 만들지 않고,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선택으로 바꿔놓는다.
그래서 이 음악은 평온해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반복되는 화성은 안전망이 아니라, 도피할 수 없는 현재다. Peace Piece는 자유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결정을 피할 수 없는 상태임을 가장 조용하게, 그러나 가장 분명하게 들려준다.
Paul Bley, Ida Lupino, Closer, ESP-Disk [Recorded: December 12, 1965]
폴 블레이의 Ida Lupino 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속도의 부재다. 템포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추진력은 거의 없다. 리듬은 전진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미세하게 흔들린다. 화성 역시 기능적으로 다음을 예고하지 않는다. 코드 진행은 최소한으로 제시되고, 해결을 암시하는 종지는 의도적으로 피된다.이 조건 속에서 Bley의 즉흥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프레이즈를 길게 끌지 않고, 음과 음 사이에 긴 공백을 둔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지금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무엇인가다. 즉흥은 확장이 아니라 절제의 연속이며, 선택은 언제나 취소될 수 있는 상태로 남는다.
이 연주에서 자유는 해방이 아니라 부담이다. 아무것도 강요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선택은 연주자 자신의 책임이 된다. 이는 소명(vocation)을 자아의 확장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앞에서 매번 응답해야 하는 삶의 태도로 이해하는 기독교적 윤리와 정확히 겹친다. Bley의 즉흥은 자유를 찬양하지 않는다. 자유가 요구하는 판단의 무게를 끝까지 감당한다.
Andrew Hill, Refuge, Point of Departure, Blue Note [Recorded: March 21, 1964]
재즈에서 자유는 종종 오해된다. 즉흥은 마음 가는 대로 연주하는 행위로, 규칙을 벗어나는 쾌감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Andrew Hill**의 음악 앞에서 이런 설명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의 말,
“I’m not interested in progressions that tell you where you’re going.”
(나는 당신이 어디로 가는 지 알려주는 진행에는 관심이 없다)
-앤드류 힐-.이 말은 은 자유를 확장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판단을 대신해주는 구조에 대한 거부에 가깝다전통적인 기능 화성에서 진행은 미래를 예고한다. Refuge는 구조적으로는 포스트밥의 외형을 유지하지만, 그 내부에서 안정 장치를 제거한 음악이다. 주제는 분명하고, 앙상블은 유지되며, 곡은 무작위로 해체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능 화성은 방향을 제공하지 않고, 드럼은 타임을 고정하지 않으며, 베이스는 루트 진행으로 길을 안내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각 연주자는 자유롭지만, 동시에 언제든 곡의 중심을 잃을 수 있는 상태에 놓인다. 즉흥은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라, 질서를 개인의 판단으로 떠안는 행위가 된다. 화성이나 리듬이 대신 책임져주지 않기 때문에, 연주자는 매 순간 “이 선택을 감당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묻게 된다.
이 음악에서 refuge(피난처)는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만들어야 한다. 이는 은혜가 자동적 안전망이 아니라, 책임을 제거하지 않는 선물이라는 기독교 윤리와 깊이 닮아 있다.
Thelonious Monk, Crepuscule With Nellie, Monk’s Music, Riverside [Recorded June 25–26, 1957]
Thelonious Monk의 Crepuscule with Nellie 는 재즈에서 보기 드문 곡이다. 즉흥이 거의 없고, 대부분이 작곡된 음악이다. 그럼에도 이 곡은 이상할 정도로 닫히지 않은 인상을 남긴다. 음악은 분명히 끝나지만, 감정은 정리되지 않는다.
이 곡은 1957년, 수술을 받던 아내 넬리를 위해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Monk는 이 상황을 설명하거나 감정을 극대화하지 않는다. 위로도, 해석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음을 절제하고, 침묵을 남긴다. 이 침묵은 장식이 아니라 태도다.
화성은 명확하고 형식도 분명하다. 그러나 종지는 강조되지 않고, 정서적 해소는 유보된다. 재즈에서 흔히 기대되는 클라이맥스가 의도적으로 제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곡의 열림은 즉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즉흥을 최소화함으로써, 음악이 듣는 사람 대신 결론을 내려주지 않도록 만든다.
그래서 Crepuscule with Nellie는 감동적인 발라드라기보다, 판단을 유보하는 음악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 음악은 기독교적 인간 이해와 닿는다. 신앙은 고통의 의미를 즉시 제공하지 않는다. 말씀이 육신이 된 이후에도, 인간은 이해하지 못한 채 시간을 살아간다. Crepuscule with Nellie는 바로 그 시간을 소리로 보여준다. 모든 것이 말해지지 않은 상태, 그러나 혼자는 아닌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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