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재즈는 정말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19년 기준, 미국 인구 중 재즈 음악을 소비한 비율은 1%에 불과했다. 재즈 소비 감소는 흔히 재즈가 “난해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그러나 이 진단은 음악 자체의 변화보다, 오늘날 우리가 음악을 듣는 방식이 얼마나 단순화되었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재즈가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음악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재즈를 집중해 듣고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재즈의 위기는 재즈 음악의 고갈이 아니라, 즉흥성과 동시성을 전제로 한 청취 조건이 오늘날의 음악 소비 환경과 점점 어긋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재즈와 서양 고전음악이 나란히 ‘마니아의 음악’으로 밀려난 현실은, 우리가 더 이상 음악을 깊이 듣도록 훈련받지 않는 사회가 되었음을 드러낸다.
오늘날 음악 소비는 빠르고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반복 가능한 훅, 예측 가능한 구조, 배경음악으로 소비 가능한 사운드가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재즈는 처음부터 그런 음악이 아니었다. 재즈는 멜로디를 ‘따라 부르는’ 음악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견디며 함께 듣는 음악이다.
재즈의 핵심은 즉흥이다. 즉흥은 실시간으로 생성되며 예측을 거부한다. 음반으로 기록된 재즈조차 ‘이미 지나간 즉흥’일 뿐, 현존하는 즉흥은 아니다. 이 음악은 청중에게 수동적 청취가 아니라 동시적 참여를 요구한다.
의미를 유보하는 시간이 필요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동시성을 견디지 못한다. 집중해서 듣는 시간, 의미를 유보하는 시간,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머무는 시간이 사라졌다. 음악은 더 이상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즉각적인 만족과 빠른 판단을 요구한다. 몇 초 안에 반응하지 않으면 건너뛰고, 한 번에 이해되지 않으면 실패한 음악으로 분류된다. 오늘날의 청취 환경에서 음악은 ‘경험’이 아니라 ‘신호’에 가깝다.
이러한 환경에서 재즈는 구조적으로 불리하다. 재즈는 처음부터 빠른 해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반복 청취를 통해 익숙해지는 음악도 아니며, 명확한 후렴이나 즉각적인 감정 표식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재즈는 소리가 생성되는 과정을 견디는 음악이다. 연주자가 무엇을 할지 알 수 없는 상태, 다음 음이 어디로 향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태를 청중과 공유하는 음악이다. 그 불확실성 자체가 재즈의 미학이며, 즉흥의 조건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청취 문화는 불확실성을 회피한다. 이해되지 않는 소리는 곧바로 제거되고, 해석되지 않는 순간은 실패로 간주된다. 이때 음악은 더 이상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소비 가능한 데이터가 된다. 재즈가 요구하는 동시성은 이 환경에서 부담이 된다. 즉흥에 참여해야 하는 청취자는 사라지고, 결과만을 확인하려는 소비자만 남는다.
음반으로 기록된 재즈조차 이 조건에서는 오해되기 쉽다. 재즈 음반은 흔히 완결된 작품으로 소비되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즉흥이 거기 있었다”는 흔적이다. 이미 끝난 즉흥을 사후적으로 재생하는 행위는 재즈의 핵심인 동시성을 상상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재즈는 음반으로만 들을 때 종종 차갑고 난해하게 느껴진다. 청중은 그 즉흥의 현장에 참여하지 못한 채 결과만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재즈와 서양 고전음악의 낮은 청취율은 하나의 공통된 구조를 드러낸다. 두 장르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 집중과 시간, 해석의 유예를 요구한다. 배경음악으로 소비되기 어렵고, 즉각적인 반응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늘날 이러한 조건을 요구하는 음악 전반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면, 문제는 장르가 아니라 청취 방식이다.
재즈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것은 재즈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재즈가 전제하는 듣기의 윤리가 더 이상 사회적으로 훈련되지 않기 때문이다. 재즈는 여전히 연주되고 있지만, 그 소리를 끝까지 견디며 듣는 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재즈의 위기는 곧 ‘듣는 능력’의 위기다. 그리고 이 위기는 음악의 영역을 넘어, 우리가 타인의 말과 낯선 목소리, 예측 불가능한 사건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재즈가 요구하는 청취는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태도다. 판단을 유보하고, 의미를 미루며,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소리에 머무를 수 있는 태도 말이다.
재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자리에 함께 머무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