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한 감각 수용이 아니다. 우리는 음악을 듣는 순간, 거의 자동적으로 그것을 어떤 의미의 자리에 배치한다. 이 음악은 위로가 될 것이다, 이 연주는 집중을 돕는다, 이 리듬은 긴장을 완화한다. 이러한 반응은 개인의 취향이나 성향을 넘어, 청취가 작동하는 일반적인 방식에 가깝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언제나 주체의 문제다. 우리는 음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듣는 순간, 우리는 이미 어떤 기대를 배치하고, 어떤 의미를 할당하며, 어떤 효과를 요구한다. 이 과정은 의식적인 선택이라기보다 거의 자동적인 작동에 가깝다. 음악은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하고, 집중을 돕거나 위로를 제공해야 하며, 최소한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
딥 리스닝 재즈 마인드풀니스는 바로 이 자동성에 개입한다. 이 실천의 관심은 음악이 무엇을 전달하는가가 아니라, 청취자가 음악에 무엇을 맡기고 있는가, 주체가 음악을 통해 무엇을 성립시키려 하는지에 집중한다. 다시 말해 의미의 내용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주체에게 발생하며 의미가 배치되는 과정을 문제 삼는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 자동성이 단순한 습관이나 심리적 반응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주체가 세계와 관계 맺는 기본적인 구조에 가깝다. 주체는 음악을 듣기 이전부터 이미 의미의 장 속에 위치해 있으며, 음악은 그 장 안에서 어떤 자리를 점유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음악은 소리로 도착하지만, 곧바로 의미를 반환해야 할 대상으로 호출된다. 이 호출은 선택이라기보다 반사에 가깝다.
자크 라캉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때 작동하는 것은 주체의 자율성이 아니라 주체의 의존성이다. 주체는 스스로 의미를 생산하는 중심이 아니라, 의미를 통해서만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존재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 어떤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감정의 언어(위로, 긴장, 집중, 해소)를 음악에 배치함으로써 “지금의 나”를 인식한다. 의미는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외부의 질서로부터 도착한다.
이 구조 안에서 음악은 단순한 감각 자극이 아니라, 의미를 맡길 수 있는 자리가 된다. 주체는 음악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고, 그 역할이 수행되기를 기대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음악이 실제로 그 역할을 수행하는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주체가 음악을 그러한 대상으로 설정했다는 사실이다. 의미는 음악에 ‘있어서’가 아니라, 음악이 점유하게 된 자리를 통해 발생한다.
딥 리스닝 재즈 마인드풀니스는 바로 이 자리의 배치를 문제 삼는다. 이 실천은 음악에 부여된 의미를 해석하거나 교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주체가 음악을 통해 의미를 성립시키는 과정 자체를 지연시킨다. 즉각적인 감정 귀속이나 기능적 해석 대신, 의미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 지연은 결핍이 아니라, 주체가 자신의 작동 방식을 인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간격이다.
특정한 재즈, 특히 하모로딕스적 조직 원리를 지닌 음악은 이 간격을 구조적으로 확대한다. 이러한 음악은 중심을 제공하지 않고, 감정의 귀결을 약속하지 않으며, 멜로디·화성·리듬을 위계적으로 배열하지 않는다. 그 결과 음악은 주체가 기대한 의미를 즉각적으로 반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실패는 음악의 부족이 아니라, 주체의 기대 구조가 노출되는 순간이다.
이때 주체는 선택 앞에 놓인다. 의미를 강제로 덧씌워 청취를 종결할 것인가, 아니면 의미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청취를 지속할 것인가. 딥 리스닝 재즈 마인드풀니스는 후자의 선택을 연습한다. 이는 해석을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라, 해석을 서두르지 않는 태도다. 의미를 요구하는 충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충동이 즉각적인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보류되는 상태다.
이 보류 속에서 주체는 처음으로 자신이 음악에 무엇을 맡기고 있었는지를 인식하게 된다. 음악이 나를 위로하지 않을 때 드러나는 것은 음악의 무능이 아니라, 위로를 필요로 하는 주체의 구조다. 딥 리스닝은 이 구조를 분석하거나 치유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주체 자신의 경험으로 남겨둔다.
이 점에서 딥 리스닝 재즈 마인드풀니스는 흔히 말하는 마인드풀니스와도 구별된다. 여기서 주의는 안정이나 이완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가 의미를 서둘러 확정하려는 순간을 알아차리고, 그 확정을 잠시 미루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도착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청취를 지속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이 실천이 겨냥하는 주의의 형태다.
결국 이 실천이 다루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주체다. 음악은 도구가 아니라 조건이며, 재즈는 해답이 아니라 지연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다. 딥 리스닝 재즈 마인드풀니스는 음악을 통해 주체가 자신의 자동성을 잠시 중단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 그 시간 안에서 의미는 제거되지 않고, 다만 즉시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주체는 비로소 자신의 청취를, 나아가 자신의 일상을 다르게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일상의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재즈 주이상스 세미나
재즈 실천으로서의 마인드풀니스
딥 리스닝 재즈 마인드풀니스가 “일상의 혁명”을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전복적 선언이나 삶의 급격한 전환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혁명이란 제도를 바꾸는 사건이 아니라, 주체가 세계에 반응하는 기본 방식이 미세하게 변형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혁명은 외부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적 장면 안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차이다.
이 차이는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나는 지금 왜 이렇게 빨리 의미를 확정하려 하는가.
1) 반응(reaction)에서 응답(response)으로
— 자동성의 정치학, 재즈 마인드풀니스가 만들어내는 일상의 차이
일상의 대부분은 반응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말에 바로 대꾸하며,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 그것을 행동으로 번역한다. 이러한 반응은 나쁜 습관이 아니라, 사회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 메커니즘이다. 문제는 반응 그 자체가 아니라, 반응이 거의 항상 자동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반응은 빠르며, 효율적이고, 익숙하다. 그러나 바로 그 익숙함 때문에 주체는 자신이 무엇에 어떻게 끌려가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딥 리스닝 재즈 마인드풀니스가 개입하는 지점은 바로 이 자동성이다. 이 실천은 반응을 억제하거나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반응과 반응 사이에 아주 미세한 간극을 만들어낸다. 이 간극이 생길 때, 우리는 더 이상 단순히 반응하는 주체가 아니라, 응답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
이 차이는 심리적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의 구조와 관련된 문제다.
자크 라캉적 관점에서 주체는 언제나 의미를 요구한다. 주체는 상황, 타자, 음악, 감정에 즉각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을 안정시키려 한다. 이 의미 부여가 곧 반응이다. 반응은 주체가 세계와 맺는 가장 빠른 합의이며, 동시에 가장 무의식적인 선택이다. 반응이 반복될수록 주체는 자신의 반응 패턴 속에 고정된다.
응답(response)은 다르다. 응답은 반응보다 느리며, 항상 약간의 지연을 포함한다. 이 지연은 숙고의 결과가 아니라, 의미가 아직 완전히 배치되지 않은 상태를 견디는 시간이다. 응답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즉시 결정하지 않는다. 대신 “지금 무엇이 나에게 요구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잠시 유지한다.
재즈, 특히 하모로딕스적 조직을 지닌 재즈는 이 지연을 구조적으로 만들어낸다. 음악은 진행되지만 방향은 분명하지 않고, 긴장은 형성되지만 해소는 보장되지 않는다. 청취자는 계속해서 반응하고 싶은 충동 즉, 이 음악은 불편하다, 이건 의미가 없다, 이해할 수 없다에 노출된다. 딥 리스닝은 이 충동을 따라가지 않는다. 음악이 아직 말을 끝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존중하며, 청취를 응답의 상태로 유지한다.
이 경험이 반복되면, 주체는 음악 밖의 장면에서도 같은 구조를 인식하게 된다. 누군가의 말이 즉각적인 해석을 요구할 때, 감정이 곧바로 행동으로 번역되려 할 때, 상황이 빠른 결론을 강요할 때 주체는 이미 한 번 연습한 지연을 호출한다. 반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응답을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응답이 항상 더 “옳은” 선택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딥 리스닝 재즈 마인드풀니스는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주체가 자신의 반응이 자동적으로 발생하고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위치를 제공한다. 이 위치에 서는 순간, 주체는 더 이상 반응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이 차이가 바로 당신이 말하는 일상의 혁명이다. 혁명은 반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반응만이 유일한 가능성인 상태를 끝내는 것이다. 응답이 가능해지는 순간, 주체는 세계에 덜 포획된다. 의미는 여전히 필요하지만, 더 이상 즉각적으로 강요되지 않는다.
2) 승화와 반복
쓸모없는 실천이 일상을 변형하는 방식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크 라캉이 세미나 VII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승화(sublimation)의 개념이다. 승화는 흔히 욕망을 고급화하거나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과정으로 오해되지만, 라캉에게서 승화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승화란 욕망을 유용하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대상을 쓸모의 질서에서 이탈시켜 ‘물자체(Thing)’의 자리에 올려놓는 행위다.
라캉은 이 맥락에서 한 친구의 일화를 소개한다. 그 친구는 성냥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성냥곽을 수집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성냥을 사용하지 않은 채, 동일한 성냥곽을 계속해서 모으고 배열한다. 이 행위는 어떤 기능도 수행하지 않고, 어떤 목적도 달성하지 않으며, 어떤 교환 가치도 생산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라캉은 이 행위를 승화의 사례로 읽는다. 성냥곽은 더 이상 불을 붙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쓸모로부터 분리된 대상, 즉 욕망이 직접적으로 걸리는 대상이 된다.
이 예시가 중요한 이유는, 승화가 ‘무언가를 더 잘 활용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승화는 대상의 기능을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능을 중단시킨다. 대상은 사용되지 않음으로써, 목적을 상실함으로써, 오히려 독특한 가치를 획득한다. 이 가치는 효용이나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가 쓸모의 질서 바깥에서 어떤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가리킨다.
딥 리스닝 재즈 마인드풀니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승화의 구조를 공유한다. 여기서 음악은 감정을 조절하는 도구도 아니고, 집중을 돕는 장치도 아니며, 치유를 제공하는 매개도 아니다. 음악은 사용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음악은 의도적으로 기능을 수행하지 않도록 놓인다. 위로하지 않아도 되고, 의미를 말하지 않아도 되며, 어떤 효과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음악은 쓸모를 박탈당함으로써, 오히려 청취의 중심에 놓인다.
이때 청취는 소비가 아니라 체류가 된다. 주체는 음악을 통해 무언가를 얻지 않는다. 대신 음악 앞에 머문다. 이 머묾은 수동적 감상이 아니라, 의미를 즉시 회수하지 않겠다는 선택에 가깝다. 음악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상태, 아무런 보상도 제공하지 않는 상태를 견디는 것. 바로 이 지점에서 청취는 승화적 실천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 승화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형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재즈 주이상스 세미나 모임은 같은 해석을 공유하지 않아도 된다. 반복되는 것은 오직 하나, 쓸모없는 청취의 장을 다시 여는 행위다. 마치 성냥곽을 다시 배열하듯, 모임은 다시 열리고, 음악은 다시 울리며, 의미는 다시 유예된다.
이 반복은 진보를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반복은 일상을 미세하게 변형시킨다. 주체는 점점 더 많은 장면에서, 모든 경험이 즉각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다. 감정이 곧바로 해석되지 않아도 되고, 관계가 즉시 규정되지 않아도 되며, 시간 자체가 성과로 환산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생긴다.
이 점에서 ‘일상의 혁명’이란 거창한 전복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를 무너뜨리는 사건도, 삶을 개선하는 프로젝트도 아니다. 그것은 쓸모의 질서가 잠시 중단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승화는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특히 대상, 시간, 감정과 관계 맺는 방식-을 서서히 어긋나게 만든다.
딥 리스닝 재즈 마인드풀니스는 이 어긋남을 의도적으로 조직한다. 음악을 통해, 모임을 통해, 반복을 통해, 대상은 다시 사용되지 않도록 배치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주체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쓸모로 환원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잠시 도달한다.
이것이 이 실천이 갖는 윤리적 의미다.
쓸모없는 것을 반복적으로 유지하는 능력,
그것이 오늘날 가장 드문 형태의 저항이다.
재즈 주이상스 세미나
동부시간: 첫 째, 세 째 일요일 오후 8시 30분~9시 30분
모임형식: Zoom
모임신청: jazzlady@gmail.com

